퇴근 시간, 모니터를 끄면서 시작되는 또 다른 나의 하루. 회사에서는 엑셀과 차트를 보던 손이, 몇 시간 후면 건반 위를 누비고 있을 거다. 오늘은 이 시간의 흐름을 솔직하게 기록해보려 한다.
18:50, 퇴근 준비
모니터 한켠에 띄워둔 악보 PDF를 급하게 닫는다. 점심시간에 몰래 연습했던 프레이즈가 아직도 머릿속에서 맴돈다. 동료들 몰래 책상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이며 연습했던 걸 아는 사람은 없겠지.
19:00, 드디어 퇴근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오늘은 20시 세션 시작이니까 식사는 포기다. 가방에서 에너지바를 꺼내 먹으며 이어폰으로 오늘 연주할 곡들을 다시 한 번 훑어본다. 때로는 귀에 이어폰만 꽂고 있어도 사람들은 음악을 듣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머릿속으로 코드 진행을 복습하기 좋다.
19:40, 재즈 클럽 도착
피아노 앞에 앉기 전, 잠시 손을 풀어본다. 회사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다 굳어버린 손목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게 중요하다. 사실 이게 투잡 뮤지션의 숨은 필수 과제다. 손목 관리.
20:00, 첫 세트 시작
첫 음을 누르는 순간, 낮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흐릿해진다. 재즈의 좋은 점이 바로 이거다.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들을 즉흥연주로 풀어낼 수 있다는 것. 오늘 회의에서 있었던 긴장감이 블루스로 녹아든다.
21:30, 브레이크 타임
세트 중간, 잠시 쉬는 시간. 다른 뮤지션들은 담배를 피우러 가지만, 나는 노트북을 켠다. 내일 아침 회의 자료를 마무리해야 하니까. 이런 순간에는 조금 공허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도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23:00, 마지막 세트
피로가 몰려올 법도 한데, 이상하게 마지막 세트가 가장 편하다. 어쩌면 낮과 밤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진 순간이라 그런 걸까. 가장 자유로운 연주가 나오는 시간이기도 하다.
24:00, 마무리
악기를 정리하고, 다른 뮤지션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다. "다음에 또 봐요"라는 인사가 오가지만, 나는 내일도 여기 있을 거다. 물론 그들은 모른다, 내가 낮에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지.
00:30, 집 도착
샤워를 하며 오늘 연주를 복기해본다. 실수했던 부분, 좋았던 순간들. 내일 아침 회사 갈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피곤하지만, 이상하게 설렌다.
이렇게 반복되는 일상이 때로는 고되지만, 묘하게 중독성 있다. 어제의 회사원이 오늘은 피아니스트가 되고, 오늘의 피아니스트가 내일은 다시 회사원이 되는 이 생활이. 마치 낮과 밤을 오가는 월광층 같다고나 할까.
내일도 나는 이 시간표대로 살아갈 것이다. 엑셀과 건반을 오가며, 차트와 재즈를 넘나들며. 이게 바로 내가 만든, 나만의 시간 디자인이니까.
#투잡뮤지션 #직장인밴드 #재즈피아니스트 #일상 #음악일기
---
다음 글에서는 회사에서의 나의 비밀스러운 음악 생활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후기] 자유로운 일상 및 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이크 앞에 선 피아니스트, 인터뷰어가 되기까지 (0) | 2024.11.09 |
---|---|
재즈와 안정 사이, 내가 선택한 이중생활 (6) | 2024.11.07 |
군대 안에서 스타트업을 하는 사람에게 온 질문에 대한 답변 (0) | 2021.07.29 |
댓글